이글루스 | 로그인  



제  목: 조선왕조 최대의 비극, 극명한 교훈의 시대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1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나의 점수 : ★★★★★

리뷰를 하기 전에 다시 한번 이 글을 읽어보았다.

[개소문펌] 지금은 광해군 시대

박시백 화백이 정리한 실록의 사실(史實)을 충분히 신뢰할 수 있다고 보았을 때 이 분석은 굉장히 매력적이다. 이 글을 전혀 떠올리지 못한 채로 책을 읽었는데도 어찌나 바로 지금의 정치사와 일치하는 점이 많은지. 물론 광해군 시대와 노무현 시대의 특성을 완전히 동일시하는 것은 위험스런 일이고 자세한 상황을 들여다보면 차이도 많지만, 어느 정도 떨어져서 본 구도에서는 소름끼치도록 닮았다.

비교할 수 있는 정치세력은 다음과 같다.

  • 광해군-노무현
  • 훈구-친일/독재세력
  • 사림-민주화세력
  • 동인-과거 민주당
  • 서인-한나라당
  • 북인-열린우리당
  • 남인-현 민주당
  • 대북-열린우리당 내 친노
  • 소북-열린우리당 내 반노

사건상의 다른 유사점은 앞서 퍼온 글에서 충분히 설명하고 있으니 참고할 만하다.

  • 한가지만 사족. 박정희를 닮은 세조가 유교정치의 근간을 흔들어놓은 이래 조선에는 암만해도 건국 이념과는 딴판인 족속들이 기생하기 시작했다. 취약한 정통성에서 오는 약점을 보완하고자 세조는 많은 신료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힘을 주었고, 그들은 그 힘을 가지고 불법과 부정축재를 자행하며 권력을 공고히 해 왔다.
    이건 꼭 개발독재의 그늘 아래에서 청산되지 못한 친일의 후예들과 권력에 빌붙은 자들의 전횡을 보는 듯 하다.

11권은 이제껏 출판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중 가장 비극적인 편이었다. 어떤 분이 말씀하신 대로, 비운의 임금 단종도 절대권력의 허무한 꿈 연산군도 이런 비극은 아니었다. 진짜.. 원래부터 멍청한 놈이었으면 모르겠는데, 조선조에서 손꼽을 정도로 풍부한 경험을 가진 데다가 얼핏 본 사건만 보더라도 시대를 초월한 안목을 갖고 있었던 탁월한 인물이 꽃을 피우지 못하고 결국 역사의 죄인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을.. 이런 비극이 또 있을까.

그렇다. 역사의 죄인이다. 이제까지 광해군을 명군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나였지만, (인조가 워낙 찌질해서 그렇기도 하다. 그래도 이 생각은 엔간해선 변하지 않을 것 같다.) 박화백의 정보 취합 방식과 시각을 신뢰한다면 분명히 그는 역사가 자신에게 부여한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그것이 능력 부족도 아닌, 자신의 재능과 장점을 썩혀버리는 방향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세자시절 전란에 빠진 국가를 위해 훌륭한 역할을 해내었으며, 그런 만큼 나라를 바르게 이끌기 위한 신념도 강했으리라. 또한-그럴 수밖에 없었겠지만-처신도 깨끗했다. 한마디로 임금이 되기 전의 광해군은 그야말로 임금이 될 자격이 차고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 시대가 요구하는 이데올로기에 부합하는 역할을 해온 사람이 정권을 잡는 것은 지극히 합당한 일이요, 역사의 순리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무릇 정권을 잡은 이는, 과거에 그가 기여했던 일들에 대해서 보상을 받으려 하거나 그 때의 경험에 휘둘려서는 안 되는 법이다. 굳이 보답을 들라면, 위정의 기회를 잡은 것으로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권좌에 오르는 순간 그 인물에 대한 평가는 리셋된다. 그리고 그때까지 그가 해왔던 일들과는 또 다른 기준이 그의 활동에 대한 평가를 좌우게 될 것이다.

광해군이 초기에 보여준 탕평인사는 제법 위정자로서 합당한 처사였지만, 그리고 소북을 중용하는 등 그가 세자시절 입었던 위험에 대한 직접적인 보복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형제들을 제거하고 각종 옥사에 대해서 과민반응을 한 것은 결국 위험에서 비롯한 원초적 불안을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정치를 그르쳤다는 판단을 들게 한다.

이제는 누구나가 인정하는 광해군의 현명한 외교 노선 역시, 그 자체로는 굉장히 빛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내치에서의 처신 때문에 자신이 실각함으로서 온전한 결실을 보지 못하고 또 한번 국가를 위기로 몰아넣는 데에 단초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찬사보다는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을 일이 되고 말았다. (어떤 분이 노무현을 싫어하는 이유가 이명박을 당선시키는 단초를 제공했기 때문이라고 하시던데..)

오늘날의 상황에 살짝 빗대어 보면, 지금 정치판에 있는 사람들 중 우리가 좀 관심을 가질 만한 사람들은 거의 모두다가 젊었을 때는 한때나마 역사가 부르는 대로 살았던 사람들이다. (심지어 명박이도.) 특히 지난 10년간 집권했던 사람들은 더더욱 그렇다. 그것만으로 기본적인 존경을 가질 만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권력을 가지고 있는 한 과거의 공은 훈장이 아니다. 10년간 여당을 했던 사람들을 보며 내 좁은 속으로는 왜 그리 인고의 지난 세월에 대한 보상을 받으려는 듯한 느낌이나, 자신을 핍박했던 세력에 대한-물론 그들은 아직도 청산되어야 마땅할 세력임이 분명하다-몰이해에서 비롯한 듯한 느낌이 드는 일이 많았던 걸까.
다행히 노무현 그 자신은 과거의 전력 혹은 정치적인 위치나 정적에 대한 감정에 상당히 자유로운 편이었지만, 우리당 사람들도 다 그랬는지는 의문이다.

인조가 융통성 없는 정책으로 재난을 불러일으킨 일이 앞으로 이명박 정권에서의 일을 예고하는 것 같아 사뭇 섬뜩하다. 그러나 이명박의 예고만으로도 가슴 떨리는 각종 삽질들에 대해서 딱히 대립각을 세울 뚜렷한 인물 또한 보이지 않으니 아득하기만 하다. 과거 범개혁세력이라고 불리거나 자칭했던 세력은 확실히 몰락했다. 그것은 무엇에서 비롯된 것일까?
광해군 시대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지 않겠는가?

내가 알고 지내는 선배 중에, 나와는 정치적으로 완전한 대척점에 있으며 논리 또한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든 종류의 것을 구사함으로써 대체로 나와 비슷한 성향을 가진 주활동 커뮤니티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분이 있다. 나는 그 선배의 거의 모든 논리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만, 딱 한 가지 동의할 수 있는 말이 하나 있었다.
'정치인은 과거의 증오를 떨어버릴 줄 알아야 한다.'
...뭐 비록 이걸 노무현을 폄하하는 데에 쓴 것은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이 말로서 김근태를 추켜올린 것에는 살짝 동의했다.

이것이 바로 광해군의 실패를 요약하는 데 가장 적절한 말이 아닐까. 증오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와 같은 종류의 정서적 불안이 그의 재위 기간을 지배했고, 또한 그를 끌어내렸다.

여담이지만 참 역사는 얄궃다. 박화백의 훌륭한 구성 솜씨 때문에 이 점이 극적으로 돋보인 것이지만, 어찌 광해군이 막 옥사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려는, 즉 올바른 위정을 위한 첫 단추가 될 수 있었던 처사가 이번에는 정말로 칼날이 되어 돌아온 것인지.
이런 역사적 우연까지 광해군의 비극을 극적으로 만든다.

비극의 가장 적절한 플롯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주인공이 악의 없는 중대한 과오의 결과로 불행해지는 이야기라고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랬다. 그리고 우리는 그 비극의 주인공에 대해서 이성적으로 비판할 수는 있어도, 좀처럼 미워할 수는 없다.
그를 역사의 죄인이라고 말하면서도, 결코 미워할 수가 없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치인가보다.
그도 인간이었다. 좀 뛰어난 인간.
그리고 16년간의 가혹한 박해를 완전히 견뎌낼 정도의 철인은 아니었던 인간. 만약 그런 굴레가 없었다면 어떤 임금이 되었을까. 많은 상상을 불러일으키지만 이제는 부질 없이 흘러간 역사. 나약한 후세들 사이에서 비극의 명군으로까지 치켜올려지는 전설..

머리로는 오늘날을 경계하고, 가슴으로는 슬픔과 아쉬움을 잔잔히 남기는 11권이었다.


PS 중간에 대박 패러디가 있다! 이 추억의 만화라니..
더욱이 그 만화로 광해군이 폄하된 사림의 시각으로 서술된 이야기를 많이 읽어서 기분 묘함.

이 글과 관련있는 글을 자동검색한 결과입니다 [?]

by 카나코 | 2008/01/29 00:12 | 작품감상 | 트랙백 | 덧글(4)

트랙백 주소 : http://purearea.egloos.com/tb/4117706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Commented by take2tv at 2008/03/04 05:45
역사란게 참 재밌긴 한데 이분 만화는 참 전 적응이 안되더군요... 십자군 이야기도 마찬가지... 너무 자기 주장을 딱 세워놓고 그 증거로 역사를 맞추시는 느낌... 그 자체로도 대단하고, 그들의 이야기와 사상에는 동감하지만 역시 그래도 '세상이 그렇게 꽉 짜여져 있겠어? 역사가 그렇게 똑같겠어? 그럼 그 사람들은 입장이 없었겠어?'라는 좀 거부감이 든달까요--;;;; 제 자신이 우유부단해서 너무 자기 신념에 자신하는 사람에 제가 좀 두려움이 있나 봅니다.
Commented by 카나코 at 2008/03/04 12:49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으면 재미를 주기에는 더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군 이야기가 편향적인 단점이 도드라지지만 참 재미는 있습니다. 그에 비하면 박시백 화백 만화는 그래도 상당히 중립적인 편이지요.
Commented by 마가목 at 2008/07/12 11:43
교과서는 지나치게 사실만 나열해놔서 몰입감이 떨어집니다.
개인적으로 전 광해군을 조선시대 왕중 제일 좋아합니다만
확실히 영창대군 죽인건 좀 문제였죠.
Commented by 카나코 at 2008/07/23 10:23
다른 매체가 가질 수 있는 장점을 잘 활용해야지요.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