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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개소문펌] 지금은 광해군 시대

찬성, 반대나 적절성 여부를 떠나 꽤 재밌는 글이라서 가져와봤다.
개소문닷컴 위만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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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정권과 노무현 정권..
묘하게 닮은 맛이 있습니다.
물론 노무현이 광해군?? 정도 씩이나 되기엔 좀 2% 부족한 맛이 있긴 합니다만..
소위 실리 외교로 현대 들어 재조명 받는 광해군도 알고보면 똘끼가 좀 있었지요..

붕당이라는게 집권 훈구파를 몰아내고 사림파가 집권하는 과정에서
이 훈구파 척결에 대한 강경파와 온건파가 갈리면서 생깁니다.
비교적 소장파였던 애들이 강경론을 펼치며 동인이 되는 거고
온건론을 펼쳤던 선배 사림들이 서인이 되는거죠.
이 동인이 또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지고 북인은 또 대북, 소북으로 갈라지는데..
이게 또 묘하게 지금 정치구도랑 비슷합니다.

서인 : 꼭 사림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훈구파(관학파)에 온정적이었고 그런 까닭에
훈구파 중에서도 과오가 적은 사람도 포함되었죠..
그 영수인 율곡 이이(사실 자기가 영수 노릇하며 붕당을 일으킨 건 아닙니다..
동인들을 설득하며 통합 노력을 하다가 결국 포기하면서 서인으로 분류된 케이스죠.)
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 중심인물 중에는 실무 관료가 사람이 많았습니다.
훈구파부터가 좀 실용주의적 경향도 있고 (그래봐야 말기엔 부페로 얼룩지지만..)
이들을 어느 정도 포용한 서인이 또 동인에 비해 덜 관념적이고 관학적인 성격이 좀 있죠
이에 비해 벼슬을 끝내 마다한 동인의 정신적 지주 이황, 조식 등과 비교해 보시면
좀 감이 잡히실 겁니다.
어디랑 좀 비슷할 겁니다. 바로 한나라당..
도로 민정당이니 어쩌니 하지만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이
민주세력(사림)이라는 YS계와 민정당(훈구파)가 합체한 거 쟎습니까..
소위 메인스트림이란 점이나 탄생배경이나 꽤 비슷하지요.

남인 : 동인 중에서도 특히 경상우도의 퇴계학파들이 중심이지요.
서인들의 학풍이 관학이랄까.. 그러니까 지금으로 치면
이율곡 총장의 국립서울대 엘리트라면
남인들은 이퇴계 총장의 사립연고대 엘리트라고 보면 되겠네요..
정치적으론 남인하면 영남! 이란 소리가 절로 나오듯 지역에 기반한 소위 민주세력,
즉 김대중의 민주당과 닮았습니다. (영남이 호남으로 바뀌었을 뿐이죠..)
김영삼(율곡)을 정점으로 모여 5공세력(훈구파)와 상도동계(보수사림)이 합친 서인
김대중(퇴계)을 정점으로 모인 호남(경상우도) 동교동계(개혁사림)의 모임인 동인..
북인 : 이게 참 걸작이죠.. 열린우리당 판박이입니다.
일단 서인이 국립대, 남인이 사립대라면.. 북인은 재야 학계라고 보면 됩니다..
남명 조식 및 서경덕 둘다 출사라는거를 애시당초 거부했던 사람들이죠.
그렇다고 퇴계처럼 무슨 서원을 세워 체계적으로 학맥을 형성시킨 것도 아니고..
특히 실천을 중시한 조식의 학풍 덕분에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의 주류가
바로 이 북인들이 됩니다. 지금으로 치면 386 운동권들이랄까요?

이 북인 중에서 조식의 수제자였던 정인홍을 중심으로 모인 세력이 대북이고
얘들이 바로 광해군 시대의 집권 세력인데...
정작 열린우리당과 가장 닮은 부분은 전대협 의장님(의병장)들이 많다느니 이런 부분이 아닙니다.
앞서 보았듯이 국립서울대(관학) 학맥의 서인 인재풀은 무궁무진합니다.
지금으로 치면 판검사, 고위관료 출신들이 즐비하단 이야기죠.
사립연고대 학맥의 동인 인재풀도 만만치 않습니다.
특히 서인에 비해 학연에 의한 결속이 단단하고 그 수도 많았죠.
문제는 대북의 경우 애시당초 골수 재야였기 때문에 인재풀이 모자랐다는 겁니다.
의병장으로 나갔다가 전사한 케이스도 상당수고,
애시당초 동인처럼 학문으로 이름을 떨치거나 서인처럼 과거급제, 출세에 목을 메거나..
이런 현실적인 메리트가 적다보니 일단 숫자가 적기도 했고,
결정적으로 정여립의 난 때 부지기수로 죽어나갔습니다.
동인이 남인 북인으로 갈라진 이유도 이 정여립의 난 사건을 지휘한
서인 송강 정철을 죽이자, 살리자 하다가 갈라진 거죠..
특히 많이 죽어나갔던 세력이 바로 북인이었고, 당연히 서인이라면 더 이를 갈았습니다.
얘나 지금이나 보수는 부페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고
이 북인은 끊임없이 세포 분열하죠.
대북 소북 골북 육북 ...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갈라집니다.
당연히 인재풀이 적을 수 밖에 없고 명색이 집권 세력인데도
관직을 서인, 남인과 갈라먹게 되는 전형적인 여소야대 정국이었던 거죠.
열린우리당 초창기 딸랑 몇 십명만 남아있었던 그 형국이었습니다.
여기서 열린우리당과 기가 막히게 똑같은 일이 발생합니다.
열린우리당이 탄핵 특수로 의석을 뻥튀기 하면서 온갖 잡스런 사람들이 다 달라붙어
당 정체성도 흐리고, 무능한 잡탕정당이 되듯이
대북도 자기들 세를 불리려고 별별 사람들을 다 긁어모으면서
온갖 시정잡배 모리배들의 소굴이 되버린 겁니다.

결국 이도저도 아닌 채 이권 및 관직만 노리는 모리배들의 당이 된 대북정권은
개혁의 주체가 아닌 개혁의 대상이 되어 보수파라 할 수 있는
서인, 남인들의 반정으로 무너지고 정인홍도 80을 훌쩍 넘긴 나이에 참수를 당하죠..
이 정인홍이 일으켰던 분란 중에 하나도 열린우리당이 했던 것과 상당히 비슷합니다.
이른바 과거사 규명법 논란을 연상케하는 회퇴변척소 사건..
열린우리당이 민족정기 바로잡기를 명목으로 과거사 규명법을 들고 나섰으나
만주군 중위 나부랭이에 불과했던 박정희에 집착하여 대중들에게
과거사 규명특별법이 " 민족정기 " 보다는 " 정치정략적 " 인 성격에 가깝다는 인상을 주고
나동그라졌듯이 정인홍도 자기 스승 조식이 문묘에 배향되지 못하는 걸 분하게 여겨
이황, 이언적을 비방하고 나서기 시작한거죠.. 그 전에 이이, 성혼 등 서인의 지주들을
씹었던 것도 있었고.. 한마디로 당시 성현으로 떠받들던 대유학자들을 물어 뜯음으로써
화를 자초한겁니다.. 성균관 유생들의 동맹휴업 및 정인홍 이름의 유적삭제 등등..
과거사법 때도 박정희 지지자들의 파상 공세.. 가공할 수준이었죠.

어쩄든 대북정권이야 열린우리당처럼 몸집 불린다고 뒤룩뒤룩 갖다 붙인
암덩어리들 때문에 썩어 문드러져 결국 망했다고 치고..
광해군 본인은 어땠을까.. 하면 이 분이 조금 정신 불안이랄까.. 그런게 있습니다.
소위 미신같은 거에 무지하게 약했던 사람이죠.
10대의 나이로 세자에 봉해져 임진왜란 와중에 전선을 오가며 분조를 이끈
대담하고 총명한 사람.. 아마도 조선의 왕들 중에 태조 이성계, 태종 이방원 다음으로
조선 백성들을 많이 만나고 조선 땅을 많이 돌아다녔을 그런 군주입니다만...
문제는 아빠인 선조가 죽기 전에 부렸던 꼬장..
갓난쟁이인 영창대군이 적자라며 그 핏덩이에 집착하며 세자를 박대하고
광해군은 언제 목이 달아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피를 말로 토하는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이러다보니 약간 정신불안이랄까.. 그런 상태가 됩니다.
그걸 가장 잘 보여주는게 바로 인조반정의 명분 중 하나이기도 한 궁궐공사 문제인데,
폐허가 된 나라에서 궁궐 다시 짓는거야 무슨 문제가 있느냐.. 싶지만
이 궁을 짓는 이유가 좀 황당했습니다. 이 부분은 퍼온 글로 대신하지요.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할때쯤 종묘의 중건이 완료되었고,
선조가 시작한 창덕궁 중건 사업이 마무리되었다.
창덕궁 중수 이후 창경궁이 지워지고, 경덕궁(경희궁), 인왕산 근처에 있던
정원군 사저에는 인경궁, 자수궁등을 짓는데 대단한 집착을 보였다.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을 당시가 임진왜란 전후라는 사실과 궁궐 하나 없어
대군 사저에서 정사를 집필해야 했다는 사실은 궁궐중수의 필요성을 역설해도
문제가 될 건 없을 것이지만, 창덕궁을 중수하여 거처할 대궐을 지었음에도
굳이 다른 궁궐들을 대규모로 공사했다는 사실은 이해하기 힘들 정도이다.
거기다가 광해군은 그 숱한 궁궐을 지었음에도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 중수에는
신경쓰지 않았다는 점이다. 역대 임금들이 거처했고, 조선에서 가장 먼저 지워진
정궁이었다는 점에서 경복궁 중건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창덕궁을 지어놓고도 거처가 비좁은 덕수궁으로 옮겨가 거처하는 등
이상한 행동을 반복했다. 이러한 점은 광해군의 말에서 볼 수 있다.
"왕이 일찍이 이의신에게 몰래 말하길
"창덕궁은 두번이나 큰 일을 치러서 머물고 싶지 않다."라고 했다.
(그것은) 대개 노산군과 연산군이 폐위된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다.
의신은 "고금의 제왕가에서 피할 수 없었던 변란들은
궁궐의 길흉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오로지 도성의 기가 쇠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속히 옮길 것을 점쳐야 합니다."라고 했다. 왕은 이후에도 창덕궁에 거처하지 않았다.
이런 운수에 대한 집착은 광해군의 생애를 통해 보았을때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왜란중에 겪었던 수많은 전란의 상처와 맏아들이 아닌 상태에서 왕세자가 된
"콤플렉스" 거기다가 아버지 선조와 대신들과의 갈등, 피를 나눈 형제들과의
피할 수 없는 권력다툼은 그를 소심스러워지게 할 뿐만 아니라,
운수에 대한 집착이 병적으로 심해지게 되는 것이었다.

이건 대북정권 몰락과도 상당한 연관이 있습니다. 궁궐 지은 재원 마련하느라
벼슬자리를 마구 팔아제꼈고 그 덕분에 온갖 잡벌레들이 한자리 씩 꿰차고 나라를
들어먹기 시작했죠... 열린우리당과 더 비슷한 점은 소위 행정수도 이전 논란처럼
광해군 당시에도 교하천도론이 있었다는 겁니다. 뭐 교하천도론은 지역발전 따위보단
풍수적인 이유 때문이었긴 합니다만..
자질은 뛰어났으나 이런 컴플렉스와 불안정한 성격..
그리고 정인홍 등 일부 대북인사들에 의지하는 코드인사라던가..
그 외에 명청 교체의 혼란기의 실리 외교란 부분을 들어 이를 노무현의
자주외교랑 빗대어 칭송하는 노사모 분들의 논리는 많이 들어 보셨을테구...
어쨌든 노무현과 광해군도 유사점이 꽤 많습니다.

광해군 몰락의 결정적 원인이 된 영창대군 살해 및 인목대비 폐위
사실 조선 전기 태종, 세조 등등 이런 짓들을 한 왕은 꽤 있습니다.
허나 광해군 시대는 성리학 원리주의에 기반한 사림들의 시대..
이런 소위 " 패륜 " 에 대한 사림들의 경악은 단지 도덕적 문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으로 용납이 안되는 것이었죠.
지금으로 치면 소위 자칭 " 자유민주주의자 " 들이 " 빨갱이 "에게 느끼는
공포, 혐오감과 비슷하달까요..
암만봐도 좌파와는 거리가 먼 노무현에게 따라다니는 " 빨갱이 " 란 딱지..
이것도 사실 광해군과 꽤나 닮았죠..

광해군과 대북정권은 결국 그렇게 무너졌습니다만
노무현과 열린우리당 정권은 어떻게 될까요??
그냥 생각해보니 그때와 지금이 닮은 구석이 많아서 함 주절대봤습니다.

by 카나코 | 2006/11/24 17:17 | 빌린지식 | 트랙백 | 핑백(1)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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