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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마작 역 정리

동아리 모임에 놀러갔을 때, 마작 도구가 준비되어 있었음에도 아무도 룰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어서 안타까웠다.
본인의 경우 대체로 진행 방법은 기억이 났는데 역 종류가 잘 생각이 나지 않았었다.

그런고로 기록 차원에서 (일본식) 마작 역의 종류를 정리해 놓는다.
역의 이름은 한자음을 기준으로 했다.

참고는 엘프 올스타즈 탈의작2에서.
(탈의마작 게임들 중 상당수가 마작 게임으로도 완성도가 높다.)

1판역-
입직 - 텐파이시 1000점을 걸고 선언, 텐파이패를 확정하고 패를 기다림.(리치)
일발 - 리치후 바로 다음 쯔모시 완성. 중간 다른 플레이어가 패를 가져가면 무효.
면전청자막 - 패를 가져오지 않은 채로 완성시킴.(자막->쯔모)
평화 - 순자+역패가 아닌 머리로만 완성시키며 순자 양면대기여야 함.
단요구 - 노두패(1,9)가 없이 완성. 울기가능. (탕야오)
일배구 - 같은 순자가 두개 포함됨. (잇페코)
역패 - 삼원패 및 그 판의 장패로 각자를 만들어 완성. 울기가능.
해저노월 - 산의 가장 최후의 한 패로 완성되었을때. 자신의 쯔모로.
하저노어 - 산의 가장 최후의 한 패로 완성되었을때. 가져와 완성.
도라 - 도라패(산에서, 드러난패 다음패. 동남서북)를 포함한 만큼 1판.
우라도라 - 리치한 상태에서 완성시, 도라표시패 뒷패를 뒤집은 다음패.
창공 - 남이 소명공을 만들면서 버린 패를 캉을 해서 완성. 울기가능. (챵캉)
영산개화 - 캉했을때 모자란 패를 보충하기 위해 가져온 패로 완성. 울기가능.

2판역-
삼색동순 - 만자 통자 순자로 같은 순자를 만듬. 울기감판.
일기통관 - 같은 종류의 수패로 1~9를 만듬. 울기감판.
혼전대요구 - 모든 면자(3개조)가 요구패(노두패+자패)를 포함. 울기감판. (챤타)
대대화 - 모든 면자가 각자. 울기가능. (또이또이)
삼색동각 - 만자 통자 순자로 같은 각자를 만듬. 울기가능.
소삼원 - 삼원패 두가지를 각자로, 한가지를 대자로 만듬. 울기가능.
혼노두 - 요구패로만 만듬. 울기가능.
삼암각 - 암각 3개를 만듬. 울기가능.
삼공자 - 공자 3개를 만듬. 울기가능.
칠대자 - 대자 7개를 만듬. (치또이쯔)
더블입직 - 첫번째 패에서 리치를 선언. (더블리치)

3판역-
이배구 - 같은 순자 두개가 2조 포함됨. (량페코)
순전대요구 - 모든 면자가 노두패를 포함. 울기감판. (쥰챤)
혼일색 - 한종류의 수패 + 자패로만 완성. 울기감판.

4판역-
나가시만관 - 버린 패가 모두 요구패일 때. 4판.

6판역-
청일색 - 한종류의 수패로만 완성. 울기감판. 6판.

역만-
소사희 - 풍패 세가지를 각자로, 한가지를 대자로 만듬. 울기가능.
대삼원 - 삼원패 세가지를 각자로 만듬. 울기가능.
자일색 - 자패로만 만듬. 울기가능.
청노두 - 노두패로만 만듬. 울기가능.
녹일색 - 녹색패(2,3,4,6,8삭패+발)로만 만듬. 울기가능.
사공자 - 공자를 네개 만듬. 울기가능.
사암각 - 암각을 네개 만듬.
국사무쌍 - 요구패 13종을 모두 모으고 + 요구패중1장으로 완성.
구련보등 - 한 종류의 수패로 1112345678999+아무수패1장으로 완성.
천화 - 오야가 처음 받은 14종의 패로 완성.
지화 - 자식이 처음 받은 13종 + 첫 쯔모로 완성.
인화 - 자식이 쯔모를 받기 전 다른 사람의 버림패를 론하여 완성.

(더블)역만-
대사희 - 풍패 네가지를 모두 각자로 만듬. 울기가능.
사암각단기 - 단기대기 사암각.
국사무쌍십삼면대기 - 13면대기 국사무쌍.
순정구련보등 - 9면대기 구련보등.



*공자에는 명공과 암공이 있고, 명공에는 대명공과 소명공이 있다. 공자를 만드는 것이 캉이다.
암공은 자신의 패만으로 완성한 공자이고, 명공은 다른 사람의 패를 가져와 완성한 공자이다.
대명공은 각자를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다른 사람이 버린 패를 캉으로 가져와 만든다.
소명공은 퐁을 한 상태에서 같은 패를 쯔모로 받아와서 만든다.
캉을 하면 도라(+우라도라)가 하나 늘어난다.

*부모의 경우 그 판의 장패로 역패를 만들면 2판이 된다.

*론해서 만든 각자는 암각이 아니다.

by 카나코 | 2008/07/23 12:38 | 잡지식 | 트랙백 | 덧글(4)

제  목: 입장 바꿔 생각을 해봐

1차출처는 이곳. : http://blog.naver.com/togepi1125/120053377465


재밌는 발상이다. 흐흐
가라프는 폴츠야, 레나는 마기사, 파리스는 세이렌을 베이스로 한 듯 하다.
밧슈만 금방 짐작이 안가는데 리플에 의하면 요진보라고.

by 카나코 | 2008/07/09 12:19 | 빌린지식 | 트랙백 | 덧글(4)

제  목: 현 시국에 가장 적절한 만평


(왼쪽에 있는 내 캐리커처를 그려주신) 박재동 화백의 작품. 한겨레신문 1995년 5월 27일자.

10년도 넘은 만평이 이토록 적절할 줄이야.

by 카나코 | 2008/06/27 17:53 | 정치 | 트랙백(5) | 덧글(63)

제  목: 신성호 기자와 나

우리 당숙부님은 옛날부터 집안의 인재라는 평이 자자했다. 자존심이 강하셔서 다른 사람들의 칭찬을 그리 하지 않는 아버지께서 아무런 주저 없이 당신보다도 똑똑하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인정할 사람이 누군가 한 명 있다면 그게 바로 당신에게는 사촌 동생이 되는 당숙부님이었다.

우리 친가는 대가족의 일원이어서 집안 사이의 유대가 크게 중요시된다. 꼭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이 정도로 가까운 친척끼리는 자주 왕래가 없을 수 없기는 하다. 동시에 큰할아버지 댁이 되는 당숙 댁에는 자주 방문했었고, 바로 또래인 육촌 동생들과도 곧잘 어울렸다.
그렇게 당숙은 결코 얼굴만 아는 정도의 그다지 상관없는 친척이 아니었지만, 원체 사람들에게 큰 관심이 없는 내게 그 집안에 대한 특출난 반가움은 없었다. 게다가 타고난 반골 기질일지, 똑똑하고 잘 사는 사람들 중에서 존경받을 만한 사람은 그다지 없다는 어렸을 적의 편견에, 당숙의 직장에 대한 반감까지 있었기 때문에 일가라는 기본적인 호감 외의 감정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내게는 그 정도 존재였던 당숙이 별안간 나에게 있어 '우리 집안의 자랑'이 되고 깊이 존경하게 된 것은, 당숙을 직접 뵙지 않은 자리에서의 일 때문이었다.

한국의 현대사를 서술한 책을 보던 중 한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다루고 있는 부분이었는데, 민주화 운동에 불씨를 댕긴 이 사건은 중앙일보의 신성호 기자가 최초로 보도하였다는 부분이었다.
신성호라면 당숙의 성함이다. 그리고 중앙일보는 다름아닌 당숙의 직장이다. 그렇게 희귀한 이름은 아니지만, 이 쯤이면 이 기자가 나의 당숙부님임은 거의 확실한 것이다. 나는 아버지께 전화를 드려 확인했고, 역시 그 기자가 당숙과 동일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그 때 얼마나 기뻤었는지 모른다. 민주화 운동의 시발점이 된 이 사건을 취재한 이가 당숙이었다면, 꼭 그 사건이 아니었더라도 당숙이 당시에 얼마나 큰 사명감을 갖고 뛰는 기자였는지 알고도 남음이 있다. 지위를 가진 사람은 모두 그럴 법한 이유가 있는 법이구나. 어쩌면 이렇게 당숙의 과거에 의해서 똑똑하고 부유한 사람들에 대한 편견이 불식되었을 법도 하다.

그 후 나는 집안 어른으로서의 당숙이 아닌 언론인으로서의 당숙의 활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당숙의 성함을 기사에서 보기란 힘들었다.
사실 그건 당연한 것이다. 당숙은 현재 중앙일보의 수석논설위원이다. 그러므로 당숙의 글은-어떤 것이 정확히 당숙의 글일지는 몰라도-작성자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 사설에 훨씬 많이 있을 것이다. 또한 지위가 있는 기자일수록 일선에서는 물러나고 좀 더 무게감있는 활동-당숙은 법조언론인클럽 회장이기도 하다-을 하기 마련이다.

곧 나는 당숙과 관련한 주변의 일에 있어 다소 섭섭한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당숙의 이름과 박열사의 이름을 포털에서 같이 검색하면, 대체로 나오는 기사가 이런 종류였다.
"신성호 기자의 특종이 민주화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그 특종은 기자실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노무현도 민주화 운동을 발판으로 성장한 정치인이 아닌가. 그런데 왜 그런 그가 기자실을 폐쇄하려 하나? (라고 쓰고 '우리 놀이터를 빼앗으려는 노무현 엿먹어라'라고 읽는다)"
당숙이 직접 한 얘기가 아니라고 해도 당숙의 이름을 팔아서 이런 식의 망발을 일삼는데 기분이 좋을 리는 없다.

우스운 일이다. 내가 항상 분개해왔던 조중동의 사설들을 누가 썼으리라고 생각했나? 항상 규탄해 마지않는 김대중,류근일같은 사람들만이 그런 글을 쓴 것이 아니다. 신성호 기자와 같은 사람들이 그런 글을 썼다. 조선일보마저 기피하는 악덕 언론인의 최고봉, 조갑제 역시 한때는 언론의 자유를 위해 뛰었던 기자가 아니었던가.

그래, 이제야 말한다. 철없을 적의 나는, 당숙이 중앙일보에 있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러던 어느날 뜻밖에도 당숙의 기자 시절의 순수함을 대변하는-것 치고는 상당히 무게감이 큰-사실 하나를 알았고, 그것을 빌미로 나는 당숙을 호의적으로 볼 좋은 핑계를 하나 얻었을 뿐이다.
마침 시의 적절하게도, 홍석현이 노무현 정부에서 한자리 할 뻔도 했다. 그 순간 나는 이성을 잃고 중앙일보라면 조,동과는 조금 다른 위치에 두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망상을 품었다. 당숙의 일까지 겹쳐서 말이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시선을 애써 돌린다고 해도,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내가 거품을 물고 욕을 했던 글 중 모르긴 몰라도 하나, 두개 정도는 당숙이 쓴 글도 분명 있었으리라.

정치적 견해가 다른 것은 개인적인 사귐이나 관계에 있어 중요한 것은 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서로간의 공존을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견해 내에서의 일이다. 사고가 다르다고 해도 어느 정도는 용납할 수 없는 한계가 존재하는데, 그것이 바로 공존에 대한 인정, 사람들이 말하는 똘레랑스의 범주에 속하느냐일 것이다.
그런 점에 있어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의 논조는 명백히 토론의 대상은 되지 못한다. 그런 논조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에게의 개인적 감정을 정당화시키는 것을 나는 '공사의 구분'이라는 아름다운 이유로 포장해 왔으나, 기실 그것은 '언행 불일치'였을 따름이다.

오늘날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의 행동은 민주주의 사회를 향한 방해의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국민의 생존권 자체를 위협하고 있음이 명백해지고 있다.
이에 따라 나는 먼저 당숙에 대한 존경을 완전히 철회하는 바이며, 사회에서 결코 당숙의 도움을 받지 않을 것을 다짐한다.

당숙부님께 죄송한 말씀이 있다면 이런 말씀을 직접 드리지 못하는 것이다. 
비겁하게 오로지 나의 공간을 빌어 혈육을 공격하는 무례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나는 앞서 말했듯 당숙과 개인적인 친분을 그다지 맺지 못했다. 그러나 단지 혈육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당숙과 그가 속해 있는 집단에 대해 무른 마음을 품었는데, 당숙은 조카인 나를 결코 박대하지는 않을 분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당숙을 뵙는 자리에서는 더더욱 스스로를 다잡기가 어려워진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폐해가 있다.

당숙은 개인자격이 아닌 중앙일보의 입장을 대변한다. 사설에 이름을 싣지 않는 것은 이유가 있다. 그것은 개인이 아니라 한 신문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가지고 한 개인을 매도하는 것은 경우에 맞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런데도 신성호라는 이름을 직접 언급하는 것은, 당숙은 공인, 유명인사라는 핑계를 빌어,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보도로 의기로운 그 이름을 내 스스로의 정체성에 조금이라도 비추고 싶은 모순된 욕망 때문이다...



...씨, 원래 이런 글 쓰려던 게 아니었는데.
시국이 이런데 별다른 행동을 하지 못한 부끄러움이 사무쳐, 요새 줄곧 제정신이 아니다..

by 카나코 | 2008/06/26 21:05 | 정치 | 트랙백 | 덧글(6)

제  목: 죽을 고비 넘긴 하경복

조선 초기에 하경복이라는 무장이 있었다.
다음은 윤승운 화백의 '서당골 호랑이 훈장님'에 소개된 하경복에 대한 야사 한 토막이다.

세종 시절 북방 야인들과의 싸움에서 공이 컸던 무장 하경복이라는 장수가 있었는데 그는 살면서 세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첫번째 고비는 젊은 시절. 하경복은 사냥을 나갔다가 커다란 호랑이를 만나고 말았다. 너무 순식간의 일이라, 하경복은 엉겁결에 호랑이의 목을 껴안았다.
그때부터 호랑이와 하경복의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호랑이는 계속 발버둥을 치고, 목을 놓았다간 대번에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절체 절명의 상황. 그렇게 버티다가 연못을 발견하고, 하경복은 호랑이를 억지로 연못에 끌고 간 후 목을 물 속에 집어 넣었다.

두번째 고비는 2차 왕자의 난 때였다. 정안대군 방원과 회안대군 방간이 차기 왕위를 놓고 벌인 싸움에서, 방원이 우세하였고 방간과 친했던 하경복을 군졸들이 방원에게 끌고 갔다. 하경복은 방원에게 항변했다. "어찌 장수를 죽이려 하시오? 장수를 죽이는 일은 나라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오." 오금이 저릴 정도로 무서운 눈빛이었다던 방원, 하경복을 노려보더니 그의 용맹함을 알아보고 그를 특별히 살려준다.

- '서당골 호랑이 훈장님'에서는 이 때의 하경복을 어느정도 지위가 있는 무장으로 얘기하고 있으나, 그는 태종 2년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어떤 야사에서는 하경복을 궁궐 갑사로 말하고 있다.

세번째 고비는 북벌 때였다. 곧 태종에게 기용된 하경복은 북방의 방비 임무를 주로 맡게 되는데, 어느 날 야인들과의 싸움에서 하경복은 그만 너무 깊이 적진에 들어가게 된다. 완전히 포위되어 거의 살아날 수 있는 길이 없었다. 말을 달리던 하경복은 나무 한 그루를 발견하고는, 달리던 말에서 번개같이 나무 속으로 뛰어올라갔다. 야인들이 쫓아왔지만 하경복이 타던 말만이 남아 있었고 그의 행방은 묘연했다. 그 후 하경복은 밤을 틈타 조선군의 진지로 되돌아왔다.

그 후 하경복은 계속 중용되어 북방의 안정에 큰 기여를 했다.


출처: 뉴스툰,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위 컷은 세종이 북벌을 논의하는 장면인데, 총사령관의 추천에 하경복이라는 이름이 들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저 장면을 읽었을 당시 참 오랜만에 다시 접한 이름이었다. 아쉽게도 이 이야기와 관련된 사실은 실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이 장면이 소개하는 북벌 당시(세종 14년) 하경복은 최윤덕,이징과 함께 판중추원사에 임명된다.

여튼 이쯤 되어야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말할 법하다.

by 카나코 | 2008/06/24 21:26 | 잡지식 | 트랙백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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